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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091201 성균관

by 블루청춘 2009. 12. 1.

여러분들은 성균관 하면 무슨 생각이 나시나요? 아마 성균관대학교 정도 아닐까요? 많은 이들이 성균관 대학이 있는 곳은 알면서 정작 이 성균관이 있는 곳은 잘 모릅니다. 성균관은 성대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있지요. 이 동네 이름이 명륜동인데 이것은 성균관 안에 있는 건물인 명륜당에서 따온 것입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명륜당은 말 그대로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뜻으로 강의하는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뜻의 명륜당.

 

 

극소수의 수재들만 입성할 수 있는 곳

이 성균관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미래의 관리들을 교육시키는 조선의 국립대학입니다. 이에 비해 향교는 지방공립학교라 할 수 있고, 도산서원 같은 서원은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은 고려 말인 13세기부터 있었으니 세계적으로도 유서 깊은 대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귀중한 유산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외면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외국인들은 이 성균관에 오면 조선의 교육체계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성균관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니 말입니다.

 

이 성균관에 들어오기 위해서 과거 지망생들은 우선 소과(작은 과거)라는 첫 번째 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균관에 들어와 숙식을 하면서 대과(큰 과거)를 준비합니다. 조선에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이 대과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조선의 과거 중 정기 과거는 3년에 한 번만 치르는데 합격생이 33명에 불과합니다. 물론 비정기적인 과거도 있고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대과를 치를 수 있지만 성균관에 들어와 대과를 준비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로열 로드라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공간과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구성

성균관의 가장 큰 특징은 이곳이 학교인 동시에 사당이라는 것입니다. 이 제도는 물론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여기에 유교의 깊은 교육철학이 있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교육은 스승을 닮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스승인 공자님과 그의 제자, 그리고 선배 유학자들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은 이렇게 사당에 모셔 놓고 정기적으로 제를 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교식의 학교에는 반드시 사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의 이념에 따라 세운 학교는 향교든 서원이든 모두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옆의 평면도에 보이는 것처럼 한쪽은 제사 공간이고 다른 한쪽은 학문하는 공간이 그것인데, 보통은 사당이 뒤에 있는데 성균관의 경우에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지라 공자 사당을 앞에 놓았습니다. 이 사당의 중심 건물은 공자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大成殿)입니다. 이 건물은 당연 보물(제141호)입니다. 이 건물은 사당이기 때문에 화려한 단청은 없고 단청의 본래 색인 붉은(단, 丹) 색과 푸른(청, 靑) 색으로만 되어 있어 아주 단출합니다.

성균관 구성도. 입구 정면 중앙에 위치한 건물이 사당 역할을 하는 대성전.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한 원형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문묘의례

중국과 한국의 성리학 대가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대성전.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직제자 15명의 신위와 주자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의 대가 6명의 신위, 그리고 퇴계와 같은 한국의 대표 성리학자 18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 합하면 39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것입니다. 이 분들께는 일 년에 크게 두 번(2월과 8월) ‘석전제’라는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사는 문묘(文廟)제례라고도 하는데 공자님이 문(文)을 이룬 분이라 해서 문성왕(文成王)이 불리기 때문에 그 제사를 문묘제례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조선조 때 아주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와서 제를 올렸습니다. 이 제사는 대단히 장엄해서 64인의 무용단과 두 그룹의 정악대가 동원되는데, 특이한 것은 이 공자에 대한 왕실의 공식적인 제사가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제례는 고려 때 중국에서 수입한 것을 세종이 복원한 것인데 중국은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그 의례들이 다 소멸됩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중국의 TV가 와서 이 성균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례를 모두 동영상으로 담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우리의 문묘의례는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한 원형인 셈입니다.

 

 

올곧고 변하지 않는 군자의 상징, 삼강오륜목

성균관에 사는 유생들은 보름에 한 번씩 이곳 대성전에서 이 거유(巨儒)들께 제를 올렸습니다. 아마 그때 유생들은 자신들도 이 분들을 닮겠다고 맹세를 했을 겁니다. 이 건물 앞에는 아주 재미있는 나무가 두 그루 있습니다. 측백나무인데 이 나무는 유교에서 소나무와 더불어 올곧고 변하지 않는 군자를 상징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이 나무를 삼강오륜목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 나무는 가지가 세 개이고 다른 하나는 다섯 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교에서 제일 중요한 가르침인 삼강오륜을 상징합니다.

 

사진 왼쪽이 삼강목, 오른쪽이 오륜목.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은 대성전에 뒤에 있는 명륜당 영역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59호)가 눈에 띕니다. 이 나무는 오백 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가르쳤다는 고사가 전해져 성균관이나 향교 같은 국립학교에는 반드시 이 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라 불리는 학생들 기숙사가 있습니다. 전체 방수를 세어보면 30개가 안 되는데 어떻게 200명을 수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이곳에서 역사책에나 나오는 퇴계나 율곡 같은 분들이 사셨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 건물이었다. 사진은 동재.

 

 

스스로 돌 위에 올라가 회초리를 든 학생들

그런데 이곳서 공부하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외출은 잘 되지 않았던 반면 시험은 한 달에 30회 이상이었다니 수험생들의 스트레스가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나라에서 대주고 공부만 시키는데 학생들을 나태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겁니다. 학생들은 그야말로 밥 먹고 공부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기숙사 앞에는 돌이 하나 있습니다. 학생들과 답사를 올 때 마다 이 돌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답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 돌은 유생이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 올라가 스스로를 견책하는 돌입니다. 성적이 잘 안 나왔을 때 이 돌에 올라가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인 자율 교육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과거를 준비하다 급제하면 다행이지만 계속 낙방하면 퇴출당하기도 한다는데 그 기준은 잘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돌 위에 올라 회초리를 들었다 한다.

 

 

학문과 함께 6가지 기예를 학습

명륜당 바로 뒤에는 존경각(尊經閣)이라 불리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육일각(六一閣)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여기에는 활과 화살을 보관했다고 합니다. 웬 활이냐고 하실지 모르겠는데 유교는 학문의 연마뿐만 아니라 6가지 기예, 즉 음악, 말타기, 예법, 산술, 서예, 활쏘기에도 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른바 전인교육이지요. 특히 궁도는 신체 연마에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한 건물이 바로 육일각입니다. 성균관을 지금까지 간략하게 훑어보았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교육의 성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은 어린 학생들에게 수학여행 코스처럼 만들어 조상들의 드높은 문의 정신에 대해 알려주면 좋을 텐데 그런 날이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의 궁도 훈련을 위해 활과 화살을 보관한 육일관의 모습.

 


조선의 서울대였던 성균관..
사법고시보다 훨씬 어려운 과거를 통하여 선발된 문과 관료들을
교육하기위한 교육기관이다.

중앙강의동인 명륜당

1. 연혁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2. 형태와 양식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으며 총 18간이다.

장대석 쌓기의 기단을 쌓고 기단 전면에 월대(月臺)를 돌출시키고, 월대 앞에 석계(石階)를 놓았다.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二翼工)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 없이 운두가 높은 중도리를 양 측벽에 선 2개의 고주와 대량 위에 걸치고, 종보를 이들 앞 뒤 중도리에 걸었다. 종보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는 대부분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나, 성균관은 명륜당이 대성전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한다. 현재, 전묘후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향교는 성균관 이외에 전주향교·나주향교·경주향교 등이다.

현재 명륜당의 현판은 앞·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고, 뒤 벽 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3. 기능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 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정원을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동·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이 밖에도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되었다.

한편, 명륜당 뜰에는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된 유교의 상징목(象徵木)인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4. 변천 및 현황

명륜당은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한편 영조(英祖) 36년(1760)에 임금이 알성(謁聖)하려고 할 때, 호조(戶曹)가 명륜당이 기울고 퇴락하였음을 보고하여 선혜청사(宣惠廳舍)를 건축하고 남은 자재로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유학을 상징하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이 2그루의 은행나무는 중종 때 대사성 및 동지관사를 역임한 윤탁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학생들에게 뿌리가 무성해야만 가지가 발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 그 근본에 힘쓰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았던 국가답게 공자사당인 대성전이 맨앞에 위치하고 있다.


대학당/수복청

문묘(文廟)를 관리하던 남자 종(從)들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대성전의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간(間)규모로 건립되었다.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1601)에 중건되었다.

동재
동·서재는 명륜당 동서로 있는 장방형의 건물로서 2간(間)이 한 방으로 되어 있는데, 동·서재를 합하면 총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재의 첫째 방은 약방이고, 그 다음은 우제일방·장의방·진사칸·하일방·하종방의 순서로 되어 있고, 끝 방을 하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첫째방은 서일방이고, 그 이하는 동재의 순서와 같다.


영조 19년(1743)에 명륜당 북쪽에 건립되었으며, 성균관 내에 있는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육일각이란 명칭도 육례 중에 하나라는 뜻으로 정해진 것이다. 명륜당 뒤에 육일각을 둔 것은 태학생들에게 글공부와 함께 체력단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으로, 태학생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유생들은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한편, 유생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점수를 원점(圓點)이라 하는데, 아침·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잘 시행되지는 않았다.

진사식당

태조 7년(1398)에 명륜당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동·서재에 기숙하던 유생들의 전용식당으로서 명륜당 동쪽에 남향, 33간(間) 규모(주방(廚房) 10간, 기명고(器皿庫) 1간, 창고 1간, 문 1간 포함.)로 이루어져 있다.

식사 때에는 배번 북을 쳐서 식사시간을 알렸으며[격고고식(擊鼓告食)], 유생들은 의관을 갖추고[구건복회합(具巾服會合)] 서로 인사를 나눈 뒤[상읍이후(相揖以後)]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다.
서재

유생들의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벌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재뢰(財賂)·주색(酒色) 등을 말하는 것과, 바둑이나 장기 두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 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 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을 받았다.

상재생(上齋生 :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은 하재를 방문하지 못하며, 하재생(下齋生 : 사학생도(四學生徒)와 같은 유학(幼學)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에게 과실이 있으면, 식손(食損 :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과 출재(黜齋 : 재에서 퇴거시키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규율은 엄격한 편이었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하였으며,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통해서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특히,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정책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 등으로 맞섰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고, 이것으로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일종의 동맹 휴학이라고 할 수 있는 권당으로 맞섰다. 조선시대 권당의 횟수는 중종때 1회, 명종 때 4회, 광해군 때 2회, 인조때 2회, 효종 때 1회, 현종 때 2회, 숙종 때 16회, 경종 때 2회, 영조 때 18회, 정조 때 16회, 순조 때 14회, 헌종 때 4회, 철종 때 5회가 있었다.
한편 유생들의 교과목은 일정한 독서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맹자』는 각 4개월, 『시경』·『서경』·『춘추』는 각 6개월, 『주역』·『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한편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들의 제반 경비는 양현고(養賢庫) 소속 토지 1,000결의 지세(地稅)로 충당하였는데, 지세는 흉년이 들면 반감 또는 전감하는 때가 많았다.

* 성균관의 청강생 (하재에 기숙했던 사람들의 존재)

성균관 기숙사 (동재, 서재)는 상재와 중재 하재로 나뉩니다.

상재는 양호실과 학장(지금의 학생회장)이 살구요

중재에는 일반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 했다 하네요.

기숙 순서는 나이순 또는 입학순이었는데 나이순으로 해야 하냐 입학순으로 해야 하냐를 두고 많은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재!!!

하재에 머물던 사람들은 성균관 유생은 아닙니다.

성균관 유생에 입학하려면 우선 생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생원진사만 가능 했습니다!

하재생들은 생원 진사가 아니나.

사학(四學)에서 뛰어난 학생들을 추천받아 성균관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합니다.

오직!! 수업만 받을 수 있으며 성균관 유생으로써의 권리를 누릴 수 는 없었다고 합니다.

성균관은 현대의 학교처럼 졸업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입학이라는 조건의 무게가 컸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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