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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_'서울성곽'의 역사⑤

by 블루청춘 2010. 5. 1.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우리동네역사체험] '서울성곽'의 역사⑤

이윤재 동대문나눔연대 대표
 
인왕산을 힘겹게 내려왔으니 이제 평지를 걸어보자. 산에서 내려왔으니 박물관에 앉아 관람도 해보고 정동길에서 차도 한 잔 마시며 쉬엄쉬엄 가도록 해보자. 100여 년 만의 봄추위도 가고 오늘은 날도 따뜻하니 아이 손을 잡고, 또는 연인과 함께 슬슬 걷기엔 정동길이 '딱'이다.

강북삼성병원(경교장)을 건너 신문로의 서쪽 서대문역 방향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농업박물관이다. 자녀들과 함께 다녀올만한 유익한 박물관이기에 소개를 한다.

농업박물관

농업박물관ⓒ 이윤재



농업박물관은 농협중앙회가 운영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농사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인류가 탄생하여 농사를 시작하며 발달한 문명을 소개하고 우리의 조상들은 무엇으로 농사지어 먹고 살았는지, 더 많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등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따라 아이들과 한바퀴 돌다보면 농업의 중요성과 함께 한톨의 씨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농민의 노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관람일:매주 월~토(일요일 휴관), 오전 9시 ~ 오후 6시
- 관람료:무료
- 교통편: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5번출구 주변


농업박물관에서 나와 다시 경향신문사를 끼고 남쪽 정동길로 들어선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연가'에 나오는 바로 그 덕수궁 정동길이다.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이 있던 곳으로 ‘정릉동’에서 유래된다. 그런데 이성계의 정비의 아들인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이 계비와 갈등을 빚으면서, 이방원이 왕이 된후 정릉을 성밖으로 이장시켜버렸다. 원래 정릉 무덤에 사용되었던 평풍석을 비롯한 석재들은 중랑천의 살곶이다리와 청계천 광통교의 교각으로 사용하여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다.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다보면 무덤에 있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정릉은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후 정동은 개화기 고종이 덕수궁 영역이었던 곳을 외국 공사관저로 내어주어 개화기 강국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고, 고종이 을미사변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덕수궁으로 환궁하며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정동은 조선의 끝자락 개화기의 모습을 볼수 있는 곳이다. 덕수궁 주변에는 영국대사관, 미국대사관저, 성공회성당, 배제공원, 이화학당, 정동제일교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정동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이화여고가 나온다.

하마비

하마비.ⓒ 이윤재



이화여고 입구에는 오래된 문앞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하고 적힌 하마비(下馬碑)가 보인다. ‘누구든지 이곳 앞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는 뜻이다. 하마비와 대문을 보니 오래된 동네의 느낌이 난다.

손탁호텔

손탁호텔.ⓒ 이윤재



이화여고 교문을 들어서면 ‘손탁호텔터’라는 표지석이 외로이 역사의 현장임을 알리고 있다. 1885년 10월 러시아 외교관 웨베르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사람 중 당시 32세인 웨베르의 처형인 안토니에트 존타크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후 '손탁'이라고 불린 독일계 러시아인 존타크는 웨베르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명성황후가 웨베르와 친교가 두터웠음은 잘 알려져 있다.)

손탁은 1895년 고종으로부터 경운궁 근처 현 이화여고 자리에 있던 184평짜리 집을 하사받아 외국인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902년 이 집을 헐고 2층으로 된 양옥집을 지었다. 바로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 32번지에 세워졌던 '손탁호텔'이다. 당시 주류세력인 지식인들은 이곳 호텔 커피숍에서 고상하게 커피를 즐기며 미국선교사들과 ‘정동구락부’를 조직하였는데, 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이완용(李完用) 등이 주축세력이다. 그들 중 일부는 독립협회로 갔고, 일부는 을사오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제 이화여고 안으로 들어와보자.

미국 북감리회 소속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옆 땅에는 선교사 스크랜턴이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학교로 유관순 열사가 이곳 학교를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이곳 우물에서 빨래를 하기도 하여 유명한 학교다.

쉽게 떠올리기 힘들지만 이곳 또한 성곽이 있던 곳이었다. 이화여고 내에는 이곳이 서울성곽이 지나던 자리였음을 보여주는 성곽돌이 곳곳에 있다. 화단, 건물의 축대등에서 숙종때 축성되었던 성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개화기를 거치며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평지였던 정릉일대의 성곽을 허물어 이곳저곳에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화여고 내 성곽

이화여고 내 성곽.ⓒ 이윤재


유관순빨래터

유관순 열사가 학교에 다니며 빨래를 했던 자리.ⓒ 이윤재


러시아공사관

정동의 제일 높은 곳에 탑으로만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 이윤재



이화여고 탐방을 마치고 나와 정동길의 왼편으로 돌아 올라가면 공원 위쪽으로 이국풍의 흰색 탑이 나오는데 구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열강들이 앞 다투어 나라 안으로 밀려드는 가운데 호시탐탐 식민화를 노리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친러파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은 자신의 눈앞에서 딴 통조림과 계란밖에 먹지 못하는 등 암살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아관파천을 단행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은 원래 경운궁(덕수궁) 영역이었던 곳 중 가장 대지가 높은 곳으로 궁궐을 비롯한 도성안을 내려다볼수 있는 곳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등 주변에 공사관을 두었던 국가들을 견제하려는 러시아 측의 정략적인 입지 선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외세에 의존하여 난국을 수습하려던 고종의 판단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가도 좋을 것이다.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 이윤재



이어 덕수궁 방향으로 내려오다보면 3거리에 서울시립미술관과 정동제일교회가 나온다. 개신교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4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소개가 되었다. 이들의 주요활동지가 정동일대였고, 이곳에 들어선 감리교 최초의 교회당이 정동교회이다. 이곳은 1897년 완공된 근대문화유산으로 건물 자체의 건축적 의미도 있지만 주변의 미국공사관, 이화여고, 배재학당과 인접한 곳으로 미국 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중심지였다는 의미도 간직하고 있다. 서재필 등 정동구락부 멤버들이 이곳에서 예배에 참여한 뒤 손탁호텔의 커피숍을 애용했다고 한다.

개신교인 정동교회 외에도 정동에는 천주교 성공회 성당도 있다. 1892년 성공회는 영국대사관에 인접한 한옥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이후 1914년 서양식 성당을 건축한다. 라틴 십자형(Latin cross十) 평면의 이 건물은 서울에 현존하는 유일한 로마네스크 건축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세계 건축가들이 선정한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이제 다시 성곽길로 돌아가보자. 정동일대에서 성곽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성곽의 흔적을 중심으로 퍼즐처럼 옛모습을 맞추어 나가다보면 정동을 관통하던 성곽과 도성의 안과 밖이 구분되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정동성곽

도심 빌딩 속에 빌딩의 축대로, 토스트 차량의 버팀목으로도 쓰이고 있는 성곽.ⓒ 이윤재



정동일대에서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구한말 개화기유적지 탐방을 이렇게 마치며, 다음 시간에는 숭례문에서부터 출발해 남산성곽을 올라가보도록 하자. 그럼 이만.

<이윤재 동대문나눔연대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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