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퍼온글

정조의 개혁정치

by 블루청춘 2009. 11. 3.

출처 사평역에 서서 | 검정글
원문 http://blog.naver.com/jb8209/70042092949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비밀편지인 어찰 299통이 발견되어 역사학계가 시끄럽다. 이른바 정조의 독살설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다. 조선일보에 글을 쓰고 있는 이덕일과 소설 <영원한 제국>을 쓴 이인화가 독살설을 굽히지 않고 있는 반면, 전부터 독살설의 허구성을 주장해 온 여러 학자들이 이번 편지를 통해 그 동안의 독살설이 근거없는 주장임이 드러났다고 맞받아쳐 양 진영 사이가 지금 뜨겁다. 현재의 논쟁은 어느 쪽도 독살설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만 이 논쟁을 조선일보와 박정희를 옹호해 온 두 사람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시대에 정조가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국가 발전주의의 뿌리를 정조에게서 찾고 있는 듯 하다. 정조의 개혁이 중단된 것은 그가 독살되었기 때문이라는 소리다. 만약 정조의 재위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조선은 강력한 국가가 되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견해다. 그리고 정조가 절대군주에 이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강력한 대통령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논리의 단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독재자 박정희를 성군 정조에 투영하고자 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래서 정조 독살설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의 쓸모는 정조가 정말 개혁군주였는가에 있다. 정조가 개혁군주가 아니였다면 독살설은 쓸모없는 시시한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병으로 죽었든 정적에 의해 독살되었든 그의 죽음은 조선의 다른 왕의 죽음처럼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게 못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의 개혁정치를 알아 보았다. 다만,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내가 바라보는 정조는 현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역사를 보는 수많은 관점 중에 하나여서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정조의 개혁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내 입장에서는 그가 재위기간 중에 백성의 안위를 얼마나 살폈는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 사상이 전래되지도 않는 조선 후기 사회에 이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무리라고 할 지 모르지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사상은 전통 유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전통 유교의 관점은 현재의 눈이다. 전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시점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눈으로 보겠다고 하였지만 내가 이 시대의 참여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정조를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전통 유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조가 과연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보고 그들의 삶을 얼마나 살폈는지의 여부도 나름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정조의 재위 기간 중에 조선 백성의 삶은 더 나아졌을까?

 

정조는 즉위 이듬해 (1778년. 6월) 대고(大誥)를 발표하여 개혁의 기본 방향을 정한다. 백성의 경제력을 높이고 인재를 양성하며 군제를 정리하고 재정을 늘린다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당시는 노론 벽파의 견제가 극심하던 때였다. 정조는 왕권강화에 나선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초계문신제를 시행한 것도, 영조와는 다른 새로운 탕평책을 시도한 것도, 장용영를 설치하여 국왕 친위부대를 양성한 것도, 홍국영을 등용하고 파직한 것도 모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행한 것이 신해년의 통공 발매(1791년)였고 문체반정(1792년)이었다. 노론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고 그들의 글을 옥죄는 방식이다. 노론과 결탁하여 국가의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이 자유로운 개인 상인들을 감독 통제할 수 있다는, 즉 난전을 금지할 수 있다는 금난전권을 철폐하면서도 국가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면서 백성의 생활 필수품을 취급하는 육의전의 독점권은 그대로 두었으며, 새로운 학풍인 패관소품체로 노론 자제들이 글을 즐겨쓰자 이를 엄금하였다는 사실은 정조의 개혁의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양반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청 문물의 우수성을 쓴 박지원의 글이 탄압을 받았다. 왕권 강화에 필요하다면 폐쇄적 신분 사회인 조선을 그대로 유지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폐쇄적 신분 사회인 조선은 그 후기에 이르러 수많은 모순을 드러낸다. 토지가 소수 양반에 집중되자 토지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 도시 빈민으로, 광산 임금 노동자로, 머슴인 고공으로, 또는 물건을 이고 진 보부상으로 힘겹게 살았다. 정조가 백성의 소리를 듣겠다며 격쟁과 상언의 방식을 완화하자 삶이 어려워졌는지 그들의 소리가 봇물 터진 듯했다. 그러나 토지 제도를 개편할 생각은 정조에게 애초에 없었던 듯하다. 토지의 집중은 농민을 유랑자로 만들고 면세지를 늘려 세종 때 비축미가 500만 섬이었던 반면 이 시기는 10분의 1도 안된 20-50만 섬에 불과할 정도로 국가 재정을 부실해진다. 결국 토지가 농민의 경제력과 국가 재정의 핵심 열쇠였지만 정조 연간에 토지 제도를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도 나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토지 제도를 바꾸자는 학자들의 주장이 무성했다. 자영농을 육성하자는 유형원의 균전제, 소유 하한을 정해 백성의 편케하자는 이익의 한전제, 소유 상한을 정해 대토지를 분급하자는 박지원의 한전제, 다소 이상적인 정약용의 여전제등 토지 제도를 둘러싸고 당대의 지식인들이 수많은 주장을 했지만 정조가  이에 귀를 기울인 흔적은 찾기 어렵다. 더구나 박지원의 한전제는 정조의 명에 따라 쓴 <과농소초>에서 직접 주장한 것이었으나 왕의 관심을 얻지 못한 듯하여 안타깝다.

 

역사상 토지는 대부분 혁명을 통해서 그 구성원에게 나누어진다. 조선의 모순이 토지의 집중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양반의 토지를 빼앗아 백성에게 나눠 주는 일은 혁명이 없었던 조선에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연산군의 시도가 있었지만 반정의 빌미에 불과했고 임란후 광해군의 양전사업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어느 왕도 토지를 백성에게 나누어 준 적 없으니 정조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백성의 안녕을 살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취 체제를 개편하는 것이다. 재위기간 24년으로 절반 이상 짧았지만, 선왕 영조에 비하면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을 겪은 조선은 국가 재정 확보와 양민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세금제도를 쉬지 않고 개편해왔다. 특산물 대신 쌀을 바치게 대동법과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영정법, 그리고 군역을 대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균역법등이다. 균역법은 영조 치세의 것으로 조선의 세제 개편은 사실상 이 시기에 마무리 된다. 그러나 백성의 삶은 여전히 곤궁했다. 정조 재위기간에도 농민은 쉬지 않고 살던 곳을 떠났으며 반면에  부자가 된 자들은 쉬지 않고 신분 상승을 노렸다. 대구 지방의 양반 호구 수는 영조 5년 18%에서 정조 10년 40%로, 울산은 같은 기간 26%에서 45%로 늘어 났으며 19세기 전후에 이르러 전 국민의 무려 70%가 양반이었다. 양반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상품 경제의 발달로 합법적인 납속책를 통해 신분 상승에 성공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하지만 군역의 회피가 더 큰 목적이었다. 불법적인 신분 상승도 성행했다. 균역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군역이 가장 고된 부담이었다. 정약용은 <애절양>에서 군역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 씨를 막은 한 사내의 탄식을 그리기도 했다. 피가 낭자한 방에서 그가 한 말이다.

"아! 아이를 낳는 것이 죄로구나"

양반이 늘어나면 남아 있던 양인들의 부담이 과중될 수 밖에 없었던 이 현실을 정조는 몰랐을까? 정조 사후의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씨를 잘라 군역을 피하고 싶었던 이런 백성의 눈물을 알았다면 그는 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을까? 정조는 줄어든 국가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줄 계획을 세우고 이는 순조 원년 공노비의 해방이라는 제한적인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수취 체제를 개편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조선은 곧 삼정의 극악한 문란으로 빠져들고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는다.  

 

 정조는 토지 개혁에나 수취 체제 개편에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입을 열면 이런 소리를 했다.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는 것이며 백성은 나라에 의존하는 것이다. 백성이 있은 연후에야 나라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이 정조의 개혁 기본 이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생각이 실현되었다는 조짐을 어느 곳에서도 나는 찾을 수 없다. 상언과 격쟁 그리고 잠행을 통해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그들의 소리를 국정에 적극 반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백성의 살림보다는 노론을 견제하고자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모이자 도시 인구가 급증하여 근대적 도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한양의 인구가 5만으로 늘어날 때다.

 

정조가 집권한 18C 후반은 세계사적으로 격동기였다. 멀리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집권기를 거친 시민 계급의 등장, 가까운 중국 건륭제의 중흥기, 난학을 바탕으로 비약적 산업발전을 이룬 일본등 전세계가 산업과 문화 그리고 사회 질서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시기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조를 거쳐 정조 때 문예부흥이라 부를 만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대동법 시행 이후 상공업의 발전과 새로운 지식 계급의 등장으로 시대적 전환을 준비할 수 있는 역량을 쌓기 시작한 때였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싹이 보이기 시작한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발전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학과 풍속화가 꽃을 피우고 또한 서학의 전래로 학문과 예술의 세속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학문과 예술의 세속화는 시민 사회가 형성되기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이다. 글과 그림이 개인의 일상에 주목하여 그들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으며 이 작품들이 시장에서 활발히 거래되기도 했다. 수많은 책방이 한양에 생겼음은 물론이다. 한글소설 판소리 사설시조등 문학 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지도 의학서 농업기술서 백과전서에서도 이 시기는 우리 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운 황금기였다. 중인들의 여항문학과 시회도 활발했다. 그러나 이런 문화 황금기의 도래가 정조의 개혁정치 때문에 생겨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조는 이런 문화적 역량을 국가 내부로 끌어들이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황제들처럼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커녕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온적 태도를 취했으며 규장각 검서관 4인의 이용후생에 관한 개혁안을 받아들인 흔적은 없고 오히려 서학관련 서적과 중국 서적 일부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금하기도 했다는 기록만 보인다. 자생적 시민 사회를 맞을 절호를 기회를 놓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개혁정치의 실체를 찾다가 나는 지금 길을 잃고 있다. 어디에서도 그의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얼차별법을 그대로 둔채 서얼 몇 명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한 것이 신분제 개혁일 수 없고, 조선의 토지와 수취체제를 손대지 않고 백성의 경제를 살피겠다는 것도 개혁일 수 없으며, 고문으로 돌아가 글을 쓰라고 강요한 문체반정이 문예부흥의 하나일 수도 없다. 또 화성을 축조하고 순행을 다녔던 일도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정조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문무에 능했고 지극한 효자였으며 백성을 정성으로 대하는 심성을 가진 듯 하다. 병을 앓으면서도 밤을 새서 공부를 하고 신하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그림을 비롯한 예술적 재능까지 대단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의 매력은 그의 출생과 왕위 등극 그리고 재위 기간중에 그가 노론과 벌였던 정치 경쟁과 갑작스러운 죽음에 더해져 후대에 신화에 가까운 인물로 기억되게했을지도 모르겠다. 호로자식이라는 욕까지 들어 있다는 이번 편지의 발견으로 새롭게 밝혀졌다는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가 그의 매력을 줄일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그가 성군이었다거나 정치력이 뛰어났다거나 또는 백성을 보살피고자 했던 마음이 지극했다거나 하는 일체의 것은 그가 개혁을 실행했는지의 여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개혁보다는 왕권 강화에 더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왕권 강화에 결국 실패하고 병으로 죽은 듯하다.

 

정조 사후 조선은 급속히 퇴행한다. 세도 정치하에서 토지와 수취체계가 극도로 문란해지자 백성의 삶은 궁핍의 끝에 다다르고 문화도 복고적인 경향을 띤다. 이렇게 시대가 급속히 반동화되었다는 사실은 정조의 개혁 정치가 실제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궁금하다. 정조는 정말 개혁군주였는가? 개혁의 사실이 있는가? 만약 정조가 개혁 군주가 아니었다면 그동안 논란을 거듭했던 정조의 독살설은 그 의미가 크게 줄지 않겠는가?  더구나 정조의 개혁 정치를 들어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우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