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여행/역사탐방

090507 강화도 역사기행 답사

by 블루청춘 2009. 6. 20.

 '2009체험학습 강사양성과정'

주관: 나눔연대, 한국체험학습강사협회

오늘은 4번째 현장답사를 하였다.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있을정도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옛부터 도성인 서울에서 60km정도 떨어진 거리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강화도 주변의 물살이 빠르고 배를 정박할수있는 항이 2곳밖에 없어 방어를 하기에 천하의 요새였다고 한다. 또한 적이 도성인 서울을 점령하려면 한강을 따라 올라오는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는데, 강화도는 이러한 적의 침입경로를 가장 먼저 차단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때는 몽고, 조선시대에는 일본과 중국의 침략에 맞섰고, 조선말기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등 서양세력의 침입이 있었던 곳이다.또한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윗돌이 무려 70톤이나 나간다고 한다. 유네스코등록 문화유산이다. 세계에 널리퍼져있는 고인돌유적중 50%정도가 한반도에 존재한다고 한다. 강화, 고창, 화순등지에 널리퍼져있던 무덤양식이다. 이렇게 큰 무덤은 주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화순지방의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고려궁터에 위치한 외규장각이다. 이는 정조시대때 어람용 의궤(조선왕실의 일상을 그림으로 담은 기록물)300여권을 보관하였던 서고이다. 창덕궁의 규장각에 있던 문서들을 이리로 옮겨놓았는데 병인양요때 이곳이 함락되어 프랑스가 약탈해간 것이다. 지난 94년 KTX를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조건으로 교환을 하기로 했다가, 아직도 반환받지 못하고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조선의 강화도 별궁

 

 신미양요의 참혹한 사진들. 미국의 함포의 공격으로 허무하게 죽어나간 당시 조선인 병사들이다.

 

 

 이곳의 포대와 건너편의 포대에서 마주보고 교차사격을 하여 적의 침임을 효과적으로 방어할수 있었다.

 

 

 건너편이 김포쪽인데, 이처럼 바다이지만 물살이 빠르고 양쪽으로 공격이 용이하여 적의 침입을 막을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후기부터 간척지를 많이 형성하여 배를 댈수있는 뻘이 많아져서 적들의 함락에 취약해졌다고 한다.

 

이렇게 성벽사이로 포를 사용하여 적의 배를 공격하였다. 

 현장학습온 4학년 학생들. 강화도는 이렇게 초등학교 현장학습의 필수 코스이다.

 

덕진진의 포. 사정거리가 700m정도였다고는 하나 이러한 재래식 무기로는 막강화력으로 무장한 프랑스, 미국등의 함선을 막을수는 없었다.

 

전등사입구로 들어가는 성벽. 이 사찰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어서 이렇게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전등사 올라가는 길. 이렇게 밑을 지나 올라다보면 웅장하게 절이 보인다. 기록에는 현존하는 최古의 사찰이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전등사 풍경

 서고까지 올라가지 못하여 삼성각앞에서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설명하고 계신 한은경선생님.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단청과 그림들이 많이 부식되었다. 

 약사전

 

 

 

 

 

 목어

 

 신미양요시절 이 사찰안으로 쫒겨들어온 조선병사들이 자신의 최후를 의식한듯 자신의 이름들을 이렇게 천정에 글로 적어놓았다.

120여년이 지난 당시의 병사들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것같아 안타깝다. 당시 조선은 서양과의 문물교류가 별로없었기에 서양인들에대한 두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이 사찰에서 소원을 빌기도 하고 이렇게 글로 기록을 해놓았을 것이다.

 

 

 

 

 

 대웅전었나? 처마밑에 처마를 받치고 있는 裸女상. 처음에는 원숭이인줄 알았는데 벌거벗은 여자란다. 이 상징물과 관련한 야사들이 있었는데,,,

 대웅보전

 TV에도 소개되었던 식당인데, 천정을 뚫고 나무가 자라있다. 사실은 나무가 먼저 있었을 것이다.

 

 강화역사박물관 입구의 철쭉. 일본품종으로 우리나라 고유한 철죽보다 색이 진하다.

 

선사시대 유물.  

 청동기시대 반달 돌칼

 고인돌을 만드는 모형

 마니산

 고려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모형

 

 

 전등사내부에 있는 서고.

 그 서고에 보관되어있던 인조대왕실록

 예전 조선 왕실의 강화도 행차도.

 화문석

 

 신미양요당시 조선배의 상징이었던 깃발을 미국에 빼았겼던 치욕적인 깃발이다.

 

 

 성벽밑쪽에는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에 방어를 하였다.

 탱자나무에 나비한마리가 앉아있다.

 강화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