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궁궐
090625 종묘
by 블루청춘
2009. 6. 25.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조선이 유교시대가 지배했던 국가인지라 조상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었다. 따라서 한양의 도읍과 함께 궁을 건립하면서 종묘도 함께 건립이 되었고 조선의 역대왕들을 이곳에 모시며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건립후 수차례 모시는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규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의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고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동양권의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함께 제례, 제례악을 그래도 보존하고 있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여러분들은 사극에서 대신들이 임금 앞에 엎드려서 “전하! 종묘사직이 위태롭사옵니다” 하는 대사를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이때 말하는 종묘와 사직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은 궁궐을 세우면 중국의 예를 따라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세웠습니다. |
가로 총 19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전의 모습. 동아시아에서 가장 긴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출처: Wikipedia>
음양의 원리가 적용된 종묘와 사직의 위치
조선도 예외가 아니라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만들었죠. 이 두 곳은 음양, 혹은 남녀의 원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먼저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시는 곳으로 남성과 하늘, 즉 양적인 원리를 대표합니다. 반면에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니 여성과 땅, 즉 음적인 원리를 대표합니다. 고대인들은 이렇게 음양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곳이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보다 먼저(1395년) 종묘를 세웁니다.
조선의 왕과 왕후는 죽은 뒤 몸은 능에 묻히고 혼은 이곳 종묘에 모셔집니다. 이성계는 우선 이곳에 자신의 4대조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세종 대에 이르자 이미 7실이 다 채워집니다. 태조, 정종, 태종까지 모셨으니 말입니다. 종묘의 제실은 원래 7개의 방밖에는 둘 수 없기 때문에 세종은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싫었던지 세종은 정전 옆에 영녕전이라는 건물을 하나 더 세워 이성계의 4대 조상 신위들을 옮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종은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게 되는데 그 뒤부터는 방을 하나씩 늘려서 왕의 혼을 모시게 됩니다. 원래의 법도대로 하면 7개 방이 다 차면 다른 건물을 지어야 하는 것인데 그냥 계속 칸을 늘여 간 것이지요.
이렇게 칸을 늘이다 보니 정전은 19칸이 되었고 이곳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후가 모셔져 있습니다. 왜 왕후가 많으냐고요? 그것은 왕에게 한 명 이상의 중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녕전에는 15명의 왕과 17명의 왕후,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내외가 모셔져 있습니다. 영녕전에는 대체로 단명했거나,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되지 못한 이들, 혹은 단종처럼 왕위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복위되는 등 왕의 역할을 잘 할 수 없었던 이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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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정전과 영녕전의 건축양식
정전과 영년전은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데 건축양식이 대비되어 재미있습니다. 종묘는 주지하다시피 사당입니다. 사당은 아주 엄숙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은 장엄하면서도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 사람들은 기념비적인(monumental) 스케일로 짓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은 인간적인(humanistic) 스케일이라 하지요. 이 두 규모의 차이는 인간이 그 건축물을 보았을 때 한 번에 알아차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같은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 건물을 파악할 수 없어 압도당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건물을 볼 때 보통 5층 이상이 되면 단번에 그 층수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옆으로 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으로 5칸 정도 이상이 되면 그 칸의 수를 셀 수 없어 곧 압도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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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뒷벽의 모습. 구획 없이 하나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 |
그런데 종묘의 정전은 어떻습니까? 무려 19칸을 옆으로 갔습니다. 이 정도 되면 사람들은 그 규모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한 반복을 통해 장엄함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에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이 정전이 가장 긴 건물이라고 하지요? 정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전에 갔을 때 반드시 가서 보아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우선 정전의 뒷벽을 보아야 합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 구획도 없이 하나로 처리했습니다. 중간에 벽을 나누는 장치가 없습니다. 이것 역시 장엄함을 보여줍니다. 단순과 반복이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가장 비싼 재료 중에 하나인 벽돌로 처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옆에서 보면 건물이 아주 깊습니다. 쉽게 말해 두껍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건물은 잘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 종묘가 죽은 혼을 모시는 공간이라 혼을 깊숙한 곳에 모시려다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계단으로 올라가 기둥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장엄한 광경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사진만 봐도 그 무한반복에 압도당하지 않나요? | |
옆에서 본 종묘 정전 회랑.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신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런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종묘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입니다. 정전이 얼마나 장엄한가를 알고 싶으면 옆에 있는 영녕전과 비교해보면 됩니다. 영녕전은 인간적인 스케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건물은 16칸이니 정전과는 3칸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담하게 보일까요? 그것은 이성계의 4대조를 모신 4칸을 가운데에 놓고 높여서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 6칸씩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떻습니까?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오지요? 그래서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건축적 장치가 건물 전체를 다르게 보이게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이것은 건물의 뒤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건물의 뒷벽은 한 칸마다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엄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종묘에서는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부수적인 설명은 다른 정보원을 통해서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만 위에서 말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나와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 |
영녕전의 전경(왼쪽)과 뒷벽 모습(오른쪽).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
종묘에는 세계유산이 또 하나 있지요? 네, 종묘제례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무형유산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 의례는 원래 일 년에 너덧 번 하던 것인데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만 합니다. 이 의례는 대단히 복잡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전공한 사람들도 헛갈립니다. 그리고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놓쳐서는 안 되는 것만 말하겠습니다.
이 의례가 세계유산이 된 것은 동아시아의 왕실 제례의식 가운데 5백 년 이상을 이어 내려온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례는 물론 중국서 유래한 것이지만 중국 것은 이미 단절되고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것은 자그마치 5백 년 이상 동안 원형이 손상되지 않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 |
종묘제례악 연주 모습.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와 함께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Wikiped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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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례의 특징은 제사임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유학의 예악사상에 따른 것으로 건물 안에서는 다양한 음식과 술이 왕(그리고 왕후)들의 혼에게 바쳐집니다. 그리고 건물의 바깥에서는 두 대로 나뉜 밴드와 64명의 무용단이 장엄한 음악과 춤을 연출합니다. 이 음악은 세종이 중국의 음악을 참조하여 직접 만든 겁니다. 성균관에서 쓰는 음악도 세종이 만든 건데 그것은 중국 음악에 가까운 반면 종묘 것은 한국적으로 변용된 것입니다. 이 의례는 일 년에 한번밖에 하지 않아 보기 힘들지만 종묘에 가면 항상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종묘에 가면 조금 불편한 것이 있습니다. 앞에 공원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음을 내고 있는 점입니다.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인 만큼, 우리 모두가 쾌적한 주변환경 유지에 힘써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 |
◆조상들앞에 제사드리는 곳에서는 왕이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들어오라는 '하마비'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 단청도 없고 맞배지붕의 엄숙한 분위기
◆이곳역시 三道가 쭉 이어져 있다.
◆향대청. 제례를 위한 준비실이다. 지금은 도서관처럼 쓰이고 있었다.
◆향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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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신당. 조선시대에 고려의 왕의 신당이 있는것이 어색하지만, 이성계를 키워준 왕이 공민왕이라고 한다.
◆공민왕 신당
◆신실의 구성.
◆재궁. 하루종일 제사를 지내려면 왕도 신하도 쉬어야 할것이다. 이곳에서 머물면서 제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정전의 신당이 늘어선 모습
◆장엄한 정전. 가로 109m나 된다. 이곳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보관하고 있다. 이곳 넓은 마당에서 1년의 5차례 제사를 지내었다. 지금도 매년 5월이면 제례를 올리는 행사를 한다.
◆정전
◆정전의 신주를 옮기는 길.
◆영녕전. 약간 급이 떨어지는 왕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