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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091201 강경대 기념관 @ 숭인동

by 블루청춘 2009. 12. 1.

1991년 4월 24일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시위 참여 후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틀 뒤인 4월 26일 명지대학교 앞에서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위해 구출대회가 진행되었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게 되었다. 백골단이라 불리는 사복 경찰관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시위 진압을 시작하자, 강경대는 학교 쪽으로 도망치기 위해 1.5m 높이의 담벽을 넘으려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은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러한 광경은 곧 다른 학생들에게 목격되어 이들에 의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한시간 만에 사망하였다.[2][3]

시위와 분신 [편집]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4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안응모 내무부 장관을 경질시켰다.[4]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5]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하였고[6] 이어서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7], 5월 3일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8],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9]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정국' 이 조성되었다.

장례 [편집]

5월 14일 명지대학교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을 끝내고 운구행렬은 서울특별시청으로 이동하여 노제를 지내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인해 이동하지 못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5월 18일 노제 장소를 서울역으로 옮기고 영결식을 다시 진행하였으나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서 또 다시 경찰의 저지에 의해 결국 공덕동에서 노제를 지냈다.[10] 우여곡절 끝에 5월 20일 광주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