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여행/서울

비오는날 쓸쓸한 '연산군묘'

by 블루청춘 2010. 2. 9.

조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과 부인 거창 신씨의 무덤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성종 7년(1476)에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두번씩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등 성품의 광폭함이 드러나자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1506년 왕직을 박탈당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 1506년에 죽었다. 부인 신씨가 연산군 무덤을 강화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달라 청하여 옮기게 되었다.

무덤 주변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도 있으며, 혼유석·장명등·향로석 등 석물이 서 있다. 묘비석 앞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 있고, 뒷면에는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 새겨 있다.
1) 우선, 묘역이나 구성 석물들이 오랜 기간동안 방치되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훼손이 심하다.
2) 묘역자체가 좁고 초라할뿐더러 왕의 묘에 걸맞는 주변공간의 조성과 관리가 매우 부실하다.
3) 다른 왕릉에 비해 문화재관리기관의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고, 관람공간, 진입로나 주차공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방문이 힘들다.

여기서, 조선시대에 조성한 묘의 형태나 석물구성들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묘 차체는 조선시대에 만든 그대로 두더라도. 묘역 주변은 현대인들이 탐방하고 역사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다른 왕릉에 버금가게 시설을 만들고 관리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투자나 관리 수준의 기준이 될 묘의 역사적 가치도 현재시점에서 볼 때는 일반 왕릉이나 폐위된 왕묘나 다를 게 없다.
사전에 보니.
문화재는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이고
사적은 "
역사상 중대한 사건과 시설의 자취"로 되어 있는데
겨우 9개월 동안 재위한 인종이나, 1년 2개월 동안의 예종에 비해, 13년을 재위한 연산군과 16년을 재위한 광해군이
오히려 더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고 훨씬 더 가치가 사적일 것이다.

▲묘지명.. 다른 임금들의 묘들은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성대하게 보존되는데,, 사적362호
▲안내소에는 해설사 한분께서 지키고 계셨다. 위로 보이는 곳이 연산군묘

▲묘역앞에는 수령이 800~1000정도되는 은행나무가있다. 풍수지리상 물이 많은 곳이라는 뜻.

▲묘역

▲문인석의 표정을 보면 살아생전 임금의 얼굴을 읽을수 있다는데,,,
▲무인석은 없이 문인석만 있었다.


▲연산군지묘

▲연산군의 묘(좌)와 왕비의 묘

▲봉분의 꼬리가 길게 늘어있는 모습

▲묘역 뒷편에는 군사 벙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