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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제주

제주목 관아/관덕정

by 블루청춘 2010. 1. 15.
 독립국이었던 탐라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조공관계에 있다가 후에 통일신라에 편입되었다. 

 935년신라가 멸망하면서 탐라는 당분간 독립했으나, 938년에는 고려에 다시 복속되었다.
  고려는 숙종 10(1105)년1105년에 탐라군을 설치했고 1121년에는 제주라고 개칭했지만, 별주, 왕자 등의 지배자 칭호는 인정하고 있었다. 원나라1274년에 탐라를 직할지로 삼고 목장을 설치했다. 원나라는 1294년에 탐라를 고려에게 돌려주었다.
 
조선 때 이르러서는 1402년(태종 2년) 10월에 성주와 왕자가 자발적으로 조선에 입조(入朝)하고 스스로 나라를 내놓았다. 태종은 탐라국이라는 국명과 성주, 왕자라는 칭호를 폐지하였다. 태종은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官),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官)이란 벼슬을 줌으로서 얼마간은 명예를 누리도록 하고 1416년(태종 16년)에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을 설치하였다. 1445년(세종 27년)에는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이란 벼슬의 칭호를 진무, 부진무 등으로 바꾸다가 나중에는 폐지하였다

제주는 관광의 섬이기 이전에 항쟁의 섬이었다. 탐라가 육지에 복속된 후 끝없이 계속되어 온 외세의 침탈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온 제주 민중의 항쟁의 역사가 점철돼 있는 땅이 바로 제주이다.
예로부터 육지로부터 조공을 강요받아 말, 전복, 귤을 비롯하여 수많은 식량등을 바쳐야 했으며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채 아직도 제대로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 4.3항쟁이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형옥·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軍馬)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였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한 관직이었다. 그 목사가 근무하던 관청이 제주목관아이다.
제주는 유배의 땅이었던 만큼 많은 목사가 파견되었지만, 성리학적 질서를 제주도민에게 강요하여 제주도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관덕정 앞 광장은 역사 이래 제주도 정치 1번지의 역할을 담당해 온 공간이다. 탐라국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핵심 행정관청은 모두 이 자리에 있었다. 이재수의 난때 이재수가 제주성에 입성하여 천주교도들을 처단했던 장소도 바로 이곳 관덕정 광장이다. 해방정국에서도 이곳 관덕정 광장은 격동의 제주 역사를 담아내던 공간이다. 4.3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1947년 3.1사건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나오는 해산 군중을 향해 미군정 경찰이 발포한 사건을 말한다. 이 발포로 젖먹이 어린애를 업은 아낙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여섯명이 숨졌다. 이 사건으로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4.3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의 사살된 시신이 십자나무에 묶인채 전시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 관덕정 광장이다. 1949년 6월의 일이다.


하마비_수령이하개하마
관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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