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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유신독재 '중정의 추억'이 남아있는 '의릉'

by 블루청춘 2010. 2. 19.

 

[우리 동네 역사체험] 박정희 낚시터로 전락...30여년 만에야 공개


도시 사람들에게 제주의 ‘올레길 걷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복잡한 일상에 업무 과다로 피로한 현대인들에게 올레는 제주의 자연을 걷는 행위만으로도 심신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다. 그래서인지 지리산 둘레길, 강화 역사유적길 등 다른 곳도 많이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이 모두 훌쩍 제주로 떠날 수는 없는 일. 주말 연인과 함께, 아이 손을 잡고 내가 사는 곳, 우리 동네 나만의 산책길을 걸으며 일상에 지친 영혼을 씻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올레'가 아니겠는가.

필자는 거대한 도시 서울에서만 31년 동안 살아왔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앞으로 연재를 통해 주로 서울에 있는 문화유적지와 산책하기 좋은 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비록 제주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선물로 받지는 못하겠지만, 한성백제부터 조선왕조까지 500년 수도로 기능해온 서울에 수많은 역사유물이 있지 않은가.

그 동안 아이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진행하면서 역사수업을 했던 장소와 필자가 답사를 했던 장소 중 추천할 만한 코스를 소개해 나가려고 한다.

이문동 의릉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의릉.ⓒ 이윤재



이 연재의 테마가 ‘우리 동네 역사체험’이니만큼, 첫 번째 순서는 필자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근처 유적지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첫 번째 소개할 곳은 2009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의릉’이다.

조선시대 릉이 수도권에 밀집돼있는 이유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시민들이 왕릉을 찾는 발길이 다시 늘고 있다.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에 대해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또한 제례의식을 통해 지금도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점,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되고 있는 점 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하였는데, 왕과 왕비 및 추존왕의 무덤을 ‘능’, 왕세자와 왕세자비 및 왕의친부모의 무덤을 ‘원’, 나머지 왕족의 무덤을 ‘묘’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인들에게 왕릉 나들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 잠든 왕릉에 일반인들이 발을 들여놨다간 제 아무리 벼슬이 높은 양반이라도 능지기(참봉)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쫓겨나는 신성한 곳이었다.

3단으로 구성된 조선왕릉

3단으로 구성된 조선왕릉.ⓒ 문화재청 홈페이지

왕릉 주변으로 조성된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등은 땔감이나 집짓기로 좋은 나무들이었지만 벌목은커녕 낙엽 한 장도 외부로 유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지켜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과 인간의 공간’ 왕릉이 남쪽에만 모두 40기에 달하는 것이다. 왕릉 중 북측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을 제외한 39기가 서울에서 100리(약 40㎞)안에 남아있다. 조선 왕릉이 대부분 서울과 수도권에 밀집되어 있는 이유는 왕릉을 조성할 당시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10리(4km)밖 100리(40km)안에 왕실능역을 두도록 정한 국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작은 땅에 묻히게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들은 죽어서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풍수지리상 가장 좋은 곳으로 왕릉을 조성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릉 주변은 또 하나의 궁궐이었다. 의릉의 크기는 43만 4386㎡, 약 13만 1400평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렇듯 전국에 있는 왕릉 40군데의 면적만 합쳐도 총 1935만㎡(585만평)에 달한다. 당대의 왕릉은 조선왕조의 철학과 제례, 그리고 건축ㆍ토목양식을 총 망라한 문화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능은 왕릉이 있는 능침공간과 석물들이 있는 2단, 3단 부분, 그리고 주변에 부속건물과 숲, 잔디밭 등이 있는 공간으로 나뉜다.

능침공간에는 양지바른 곳에 넓은 풀밭을 만들고 거대한 능을 만든다. 옆으로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 12면을 세운 뒤 13칸의 난간석을 두른다. 그 외에도 돌로 만든 양과 호랑이상 각 2쌍과 혼유석을 배치하고 양쪽에 망주석을 1쌍 세운다. 그 옆으로 다시 3면의 곡장을 설치하고 나서야 능침공간이 완성된다.

한단 아래에는 문인석과 석마 1쌍, 그리고 혼령에게 길을 알려주는 장명등이 배치된다. 다시 그 한단 아래에는 무인석과 석마 1쌍이 배치되는 등 2단, 3단 부분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수복방, 수라간, 어도(임금 행차길), 우물 등을 만들고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때죽나무, 오리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철쭉, 진달래 등이 넓게 펼쳐 봄에는 꽃향기를, 여름에는 녹음을,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상록수의 푸르름을 각각 뽐낸다.

유신독재 하에서 수난 겪은 '의릉'

의릉은 조선 20대 왕인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경종은 4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했던 왕으로 19대 왕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난 외아들이다. 장희빈이 인현왕후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사약을 받으며 어린 왕세자의 고추를 잡고 늘어져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이후로 항상 시름시름 병약하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노론정권은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에게 빨리 왕위를 물려줘야 된다고 압박하였다. 이처럼 왕위에 올라 4년간 병석에서 보내다가 노론, 소론 간의 당쟁으로 뚜렷한 치적도 남기지 못하고 1724년(경종 4)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월 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사적 204호로 지정된 문화재였으나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역 내에 자리 잡았던 탓에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중앙정보부가 이사를 가면서 안기부의 주요건물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능의 영역은 1996년 5월 1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유신독재의 흔적' 새겨진 의릉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에 조성했던 인공연못,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의릉

연못이 없어진 현재의 모습.ⓒ 이윤재



의릉은 다른 왕릉들처럼 긴 세월을 별 탈 없이 견뎌왔지만, 1962년 중앙정보부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다음부터 왕릉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국민들의 접근금지 구역이 되었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서 넓은 축구장을 조성하고 콘크리트 청사 건물을 세우는가 하면, 좌측 능선 역시 청사를 짓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냈다.

1972년경에는 정자각 앞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의 땅을 파서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관상어를 기르며, 외래수종 식재와 전통에 어울리지 않는 조경 시설물들을 설치하였는데, 박정희가 자주 들러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과 격리된 채 원형을 잃고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해 버렸던 의릉은 약 30년 만인 1995년 중앙정보부의 이전으로 접근 금지 구역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의릉은 능의 주인인 경종이 당쟁 속에 순탄치 못한 짧은 삶을 살다간 것과 같이 많은 고난을 겪었다.

2003년 발굴조사 당시 남아 있던 고 건축물은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 뿐이었으며 수복방, 수라방, 재실은 멸실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 수복방, 재실 등의공간은 복원중으로 완전한 왕릉의 모습을 갖출 준비를 하고있다.

자연과 함께 산책할만한 녹지가 없는 서울에서 조선의 임금과 백성들이 정성들여 가꿔놓은 조선왕릉은 도시 서울에 사는 후세들의 휴식을 위한 조상들의 선물이 아닐까?

의릉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의릉.ⓒ 의릉


의릉

의릉은 조선 20대 왕인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이다.ⓒ 이윤재


의릉 내 안기부 건물

이후락이 7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던 안기부건물. 역사적 중요성이 있어서인지 한예종으로 편입되지 않고 의릉 내에 보존되어 있다.ⓒ 이윤재


의릉에서 설맞이 윷놀이 하는 동네 주민들

국민들과 격리된 채 원형을 잃고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해 버렸던 의릉은 약 30년 만인 1995년 중앙정보부의 이전으로 접근 금지 구역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사진은 의릉에서 설맞이 윷놀이에 한창인 동네 주민들.ⓒ 이윤재



<이윤재 동대문나눔연대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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