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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우리동네 역사체험] 걸으면서 배우는 '서울성곽'의 역사①

by 블루청춘 2010. 3. 5.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도성전투' 실제로는?

[우리동네 역사체험] 걸으면서 배우는 '서울성곽'의 역사①


'우리 동네 역사체험'에서 두번째로 소개할 장소는 서울성곽(한양성곽)이다. 성곽의 둘레만 총 18.2km인 성곽길을 중심으로 인근의 근현대사 문화유산까지 포함해 총 5회에 걸쳐 탐방을 함께 할 예정이다. 서울성곽도 문화재청과 서울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한 정비사업을 진행중에 있다.

다섯 차례의 탐방이 진행될 순서를 먼저 설명하면,
첫 번째 탐방은 성북동 ~북악산 숙정문 ~ 창의문(자하문)으로 내려오는 북악산 성곽길,
두 번째 탐방은 창의문 ~인왕산 ~ 사직단까지의 인왕산 성곽길,
세 번째 탐방은 서대문 ~ 정동 ~ 남대문의 정동 일대,
네 번째 탐방은 남대문 ~ 서울타워~ 광희문의 남산 성곽길,
다섯 번째 탐방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혜화문까지의 낙산 성곽길이다.


먼저 성곽답사를 떠나기 전 우리가 살고 있는 수도 서울과 조선의 한양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성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실내 공부를 하고 떠나보도록 하자.

서울성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수선전도

수선전도. 조선시대 한양지도로 형광색 부분이 경복궁, 서울성곽, 4대문과 4소문이다.ⓒ 민중의소리

1392년 개성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후 한양천도 계획을 명하고 3년 뒤인 1395년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최측근인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한양성곽)을 축성하기 시작한다.

서울성곽은 풍수지리 명당론에 따라 한양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4대산인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18.2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 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이었으니 서울인구의 3배가 넘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동원된 국가적인 토목 공사였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4대강 사업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실로 전국의 힘쓸만한 장정들은 대부분 동원되었던 것이다.

인부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는데 추운 겨울 자신이 먹을 식량을 지게짐 지고 올라와 임금도 못받는 강제부역을 한 것이었다. 그중에는 동사, 압사, 아사, 골병이 들어 축성공사에서만 사망자가 872명에 달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실록에 기록된 사망자 수 외에도 골병 든 몸으로 고향에 내려와 죽은 농민까지 포함을 한다면 1천명이 넘는 전국의 백성들이 임금도 받지 못한채 왕명에 의한 한양 도성축성으로 목숨을 바친 것이다. 조선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는 세종 재위시기의 농민들의 처지가 이러하였다.

이후 서울성곽을 재정비 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였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성곽은 큰 전란에서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다. 따라서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도성전투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 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한 남한산성과 강화도산성을 수축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며 이마를 땅에 9번 찧으며 군신관계를 맹세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였다. 이때 맺은 조약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서울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704년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협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전의 서울성곽이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오늘은 서울성곽의 역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함께 공부해 보았다. 다음 시간부터는 등산화 신고 수첩 들고 본격적인 역사탐방을 시작해보자. 그 때까지 예습 열심히 해 주세요.

[참고자료] 문화재청 북악산 서울성곽 홈페이지(http://www.bukak.or.kr/index.asp), '다시찾는 우리역사'(한영우 저)

 

시대별 성곽축조기술의 변천모습. 가운데 부분이 세종때 태조때 메주만한 돌로 쌓은 성곽이고 좌우로는 숙종 30년의 성벽으로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튼튼하게 쌓았다.ⓒ 이윤재


서울성곽

서울성곽.ⓒ 이윤재


 

서울성곽.ⓒ 이윤재



<사진1. 서울성곽지도. 종로구청 홈페이지에서 구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