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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역사탐방

물산장려운동

by 블루청춘 2010. 4. 12.
3. 경제자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1920년대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면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민족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족 자본을 육성하여 경제적 자립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급자족, 국산품 애용, 소비 절약 등을 내세웠으며, 물산 장려가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자작회, 물산 장려회,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의 단체들이앞장서서 이끌었으며, 전국적인 규모의 경제적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농민과 노동자들은 일제의 경제적 착취에 대항하여 소작 쟁의와 노동쟁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경제 투쟁인 동시에 항일 독립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교육, 언론, 등 문화분야에서 전개되는 한편, 경제적 자립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개항 이후 외국의 경제 침투에 대항하여 민족 자본을 육성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운수, 은행, 광산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인경영 체제가 도입되었다.

    특히, 대한 제국은 적극적인 상공업 진흥 정책을 실시하여 새 기술을 도입하고 공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경제 발전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자립은 어려웠다.

일본은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도로와 수도 시설을 갖추고, 은행,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시설은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일본인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필요한 시설비는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어 부담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는 일본에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라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서상돈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시작되었다(1907).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이 운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경제의 자주성을 찾으려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으나, 통감부의 방해로 중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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