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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전주 전동성당, 경기전, 한옥마을일대

by 블루청춘 2010. 8. 27.
전주는 900년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이자,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탯자리로 역사의 중심이 되어온 도시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전 지역과 제주도까지 관할했던 전라도의 실질적인 수도로, 행정중심지로 큰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전주이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가 6개소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주는 도읍지의 요건을 갖춘 완벽한 도시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전통도시

전주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판소리의 본고장으로, 전통생활양식의 근간인 한옥·한식·한지 등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담고 있는 도시이다. 주변의 드넓은 평야와 바다로 연결되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춘 전주는 일찌감치 풍요의 고장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러한 풍요와 여유로움은 문화예술을 꽃피우고 섬세한 멋과 맛의 고장으로 천 년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서울을 출발해 전주 초입에 오자 ‘전주’라고 쓰여진 넉넉하고 호방한 글씨가 먼저 반긴다. 서예가 여태명 교수(원광대)가 썼다는 전주 톨게이트 현판은 민체(조선시대 백성들이 서간 또는 한문소설 번역에 쓴 글씨체)로, 여태명 교수가 처음 명명한 한글 글씨체이다. 전주사람 이야기로는 ‘전주’ 현판에는 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입구와 출구의 현판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다르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입구의 현판 자음은 작게 하고, 모음은 크게 했으며, 출구 현판은 그 반대로 되어 있다. “자음은 아들을, 모음은 어머니를 뜻하는데, 고향으로 들어올 때는 어머니의 큰 사랑과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고 나갈 때에는 자식들이 크게 되라”는 뜻에서 각각 다르게 쓰였다고 한다.

경기전 앞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전동성당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건립됐다. 1907년부터 1914년에 걸쳐 세워진 전동성당은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끌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의 상징 경기전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古宮)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안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전주사고가 조선의 역사를 지켜냈기에 그러하다.

 

경사스런 땅에 지어진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선왕조의 역사를 보존하는 사고의 설치는 조선 왕실의 영원함을 바라는 점에서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경기전 정문 앞에는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 있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어서 이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보는 전주여행 1번지 전주한옥마을

전주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야 제 맛이라고 한다. 국제슬로시티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은 가장 한국적인 문화를 볼 수 있는 전주의 랜드마크이다. 이 때문일까. 전주한옥마을에 오면 누구나 선비가 되고 규수가 되어 넉넉해진다. 700여 채의 한옥이 빼곡히 군락을 이룬 전주한옥마을은 전국 유일의 도시한옥군이다.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문화시설이 산재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만의 독특한 생활문화공간이다.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옛 선비들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전주한옥마을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먼저 오목대를 찾았다.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에서 태조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오목대이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경 개선길에 들려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 새 나라 개국의 꿈을 중국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를 통해 호기롭게 불렀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함께 길을 동행했던 포은 정몽주와 갈라서게 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나무 계단으로 정비된 길을 따라 오목대에 오르려는 초입에 ‘전주한옥마을’이라는 돌 이정표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 산책로 계단을 타고 오목대에 오르니 까만 기와지붕이 가지런히 들어선 전주한옥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확 트인 전망이 정갈하고 소담스럽다. 700여 채의 기와 능선이 이어진 전주한옥마을의 유래는 1990년 초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성 안으로 진출하면서 당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해 반발했던 전주사람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짓고 모여 살면서 지금의 한옥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어 규제에 묶여 있다가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전주의 정체성을 살린 관광자원으로 탈바꿈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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