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간 이쪽저쪽에는 국사당,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공원, 홍난파 생가, 권율장군 집터, 사직단,
경교장, 경희궁, 경운궁,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길, 서소문 터 등
굵직한 유적지들이 있었다.
경복궁역에서 동료들을 만나 출발..
나름 경치가 좋고 아기자기 꾸며 놓은듯.
화강암 바위에 정으로 나무를 박아넣은 다음 물을 부으면 나무가 물에 부풀어오르면서 거대한 바위가 쪼개진다.
국사당(國師堂)을 이곳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샤머니즘)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이 오묘하게 생긴 바위(지형학에서는 Tafoni라 합니다)에서 많은 여인들이 아들 낳기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이 바위를 기자(祈子)바위라고도 부릅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인은 남성에게 대를 이어주고 필요한 모든 것에 자기를 희생하는 삶 외에는 없었습니다. 아들낳아 대를 이어주기에는 여성의 생명과 미래까지 걸어야 했습니다. 쌀을 제물로 바치기 때문에 비둘기들은 편하게 그들의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제물로 놓여진 쌀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내려 앉았습니다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유학자 정도전(鄭道傳)과 불교스님 무학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다.
한양안으로 들여놓으면 불교가 흥할것이라 여겨 반대를 했던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돌맹이를 바위에 붙여놓았다. 무엇때문에 그랬을까?
딜쿠샤
태평양전쟁의 발발(1941)로 식민지 조선을 떠났던 알버트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옵니다. 3년 후, 알버트는 미국에서 죽지만(1948년)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으로 양화진의 아버지 옆에 묻혔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졌던 이 건물은 6살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던 알버트의 아들 부르스 테일러가 2006년 이 집을 찾으면서 그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주택처럼 쓰이고 있다.
한양성곽 외곽의 산비탈에는 해방이후 근대화과정을 겪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남대문시장이 있는 상동(尙洞)에 있던 독일영사관은 1906년 봄, 종로구 평동 26번지에 위치한 한성전기회사 사장인 콜브란의 주택을 구입하여 옮겼습니다. 독일 영사관이 있으니 영사관 주변으로 독일인들이 많이 살았나 봅니다. 1930년대 어느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집에 1935년 30대 후반(38살)의 홍난파가 이사를 왔습니다. 홍난파는 이 집에서 6년을 살다가 1941년 늑막염이 발병해 경성요양원에서 여름의 긴 무더위가 끝날 때인 8월 30일. 44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현재 삼성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전체를 복원하기로 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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