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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윤동주가 '별 헤는 밤' 시상을 다듬은 곳은?

by 블루청춘 2010. 4. 2.

윤동주가 '별 헤는 밤' 시상을 다듬은 곳은?

[우리동네역사체험] '서울성곽'의 역사③

이윤재 동대문나눔연대 대표
<민중의소리>는 이윤재 동대문나눔연대 대표의 ‘우리 동네 역사체험’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역사체험’은 아이 손을 잡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역사유적지를 소개하는 꼭지입니다. 이윤재 대표는 동대문나눔연대 '놀토교실' 아이들과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체험학습강사협회 소속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민중의소리> 독자들이 직접 체험한 ‘우리 동네 역사체험’을 투고해주시면, 이 연재가 보다 풍성하게 꾸며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네 역사유적지나 산책하기 좋은 장소가 있으신 분은 jjy@vop.co.kr로 언제든 글과 사진을 보내주세요.


서울성곽탐방 두번째 코스는 한양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코스이다.

조선시대 도성 서울이 4대산(북악, 남산, 인왕산, 낙산)으로 성곽이 둘러쌓인 분지임은 지난 시간에 설명한바 있다. 또한 풍수지리상 경복궁에서 임금이 남향을 바라볼 때 좌청룡이 낙산, 우백호가 인왕, 북현무가 백악, 남주작이 남산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풍수지리에 밝은 일본인들이 가장 경계한 곳이 바로 인왕산이다. 화강암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기와 경복궁을 감싸고 있는 산세 때문이었는지 인왕산 곳곳에 일본인들이 두껍고 길다란 쇠못을 박아놓았다. '김신조 사건' 이후 민간인 통제구역이던 인왕산의 출입이 다행히도 다시 자유롭게 허용되면서 바위 깊이 잔인하게 박혀있던 쇠못들도 하나둘씩 뽑혀졌다.

인왕산은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이다. 구간 이쪽저쪽에는 국사당, 선바위, 서대문형무소, 홍난파 생가, 권율장군 집터, 딜큐샤, 사직단, 경교장, 서대문 터 등 굵직한 유적지들이 있다.

출발: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마을버스를 갈아탄 뒤 자하문고개에서 하차

윤동주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이윤재

지난 시간에 창의문까지 다녀왔으니 여기에서 이어서 출발한다. 창의문에서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선 옛 도성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운좋게 날씨 맑은 날, 창의문과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면 북한산, 북악산, 경복궁, 세종로, 남산, 종묘, 창덕궁 등 조선 한양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의문에서 부암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돌면 T자 길이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북악 스카이 웨이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인왕산길이다. 초입에는 예전 청운아파트를 공원화한 청운공원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 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탄생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윤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누상동에 하숙하며 하숙집에서 가까운 인왕산 자락 청운공원 주변을 거닐며 대표작인 ‘서시’, ‘별 헤는 밤’ 등의 시상을 가다듬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왕산을 오르는 길은 옛 성곽을 복원한 길이다. 성곽을 따라 나란히 난 계단을 걸어가면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는데, 공휴일 다음날은 숲휴식을 위하여 등산로 출입이 통제된다. 정상을 향해 걷다가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 북악산의 한양 성곽이 보이고 그 뒤에 병풍처럼 한양을 감싸는 북한산이 보일 것이다.

이제 정상에 올라 도성 안을 바라보자. 보통 서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남산을 많이 가는데, 조선시대 한양의 특성과 서울의 형성원리를 살펴보려면 인왕산과 낙산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동쪽을 보면 옛 도성 안의 모습이 보인다. 이 지점에서는 먼저 북악산, 청와대, 경복궁, 세종로 등 한양의 중심축을 보자. 빌딩 숲과 경복궁이 보이고, 세종로축과 직각으로 만나는 종로축이 있고, 그 남쪽에 청계천까지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도성

정상에서 바라본 도성. 흐린 시계사이로 청와대, 경복궁, 광화문이 보인다.ⓒ 이윤재



서쪽을 보면 도성 밖의 모습이 보인다. 내부순환도로, 모래내, 의주대로가 보이는데 내부순환도로는 하천(홍제천) 위에 세워진 도로이다. 홍제천은 원래 사천, 우리말로 모래내라 불리던 하천이다. 사천은 삼각산, 보현봉, 백악으로 연결되는 도성의 주맥을 기준으로 서쪽의 물이 모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인왕산과 무악 사이에 형성된 길이 의주대로이다. 이 길위에 도성의 서북쪽 역원인 홍제원과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과 영은문이 있었다. 개화기 독립협회는 청나라에 대한 독립의 의미로 영은문을 없애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 앞에는 서대문형무소가 보인다.

내부순환로

정상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내부순환로.ⓒ 이윤재


서대문형무소

서대문 형무소.ⓒ 이윤재


성곽

인왕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성곽의 모습.ⓒ 이윤재



이제 인왕산을 내려가자. 인왕산은 돌산으로 내려가다 보면 곳곳에 기이한 형태의 바위들이 보인다. 그중 하나가 선바위이고 근처에는 국사당이 있다. 이 근처에 다닥다닥 들어선 집이라는 집은 모두가 ‘절마을’이다. 이 마을의 맨 윗자리에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국사당은 최영장군, 무학대사, 이성계를 비롯한 여러 무신상을 모신 신당이다. 조선 태조 4년(1395) 목멱산(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여 호국의 신으로 삼고 이를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국가적인 사당이다.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굿을 행하는 곳으로 무속신앙의 맥을 잇는 굿당으로 사용되어 일년 열두달 굿판이 이어지고 있다. 원래는 남산 팔각정 부근에 있었으나 1925년 남산 중턱에 일제의 신사(神師)가 세워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국사당

국사당.ⓒ 이윤재



국사당 바로 위가 선바위이다. 선바위는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참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참선의 선자를 따서 이처럼 불렸다. 현재 이 바위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하여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불린다.

선바위의 유래는 조선 건국에 얽힌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일화 속에 남아 있다.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성 밖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로 왕사(王師)인 무학과 문신인 정도전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유인즉슨 선바위를 성 안으로 넣으면 불교가 왕성하여 유신(儒臣)이 물러날 것이요, 밖으로 내놓으면 승려가 맥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태조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안쪽으로 성을 쌓은 자리만 눈이 녹았다고 한다. 태조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여 선바위를 밖으로 내놓고 성을 쌓았다. 이에 무학이 "이제 중이 선비의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태조가 꾸었다는 꿈의 사실을 살펴보면 해가 잘드는 능선을 따라 눈이 녹았을 것이고 양지 따라 성곽을 쌓는 것이 원칙이었으니 유학자인 정도전과 불자인 무학의 갈등에서 유학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조선의 기본이념인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이어진다 하겠다.

휴우~ 설명도 하고 성곽을 따라 산길을 걷다보니 숨이 찬 관계로. 인왕산의 나머지 코스 탐방은 다음 시간에 계속~^^

*참고 문헌: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이현군 저), 답사여행의 길잡이_서울편(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선바위.ⓒ 이윤재



<이윤재 동대문나눔연대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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