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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신문사'가 많은 길이라 신문로? '서울성곽'의 역사④

by 블루청춘 2010. 4. 18.
서울성곽탐방 두번째 코스인 인왕산 코스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한참 숨고르기를 하고 이제 내리막길만 남았다. 마침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이니, 주변 경치도 휘휘 둘러보면서 함께 탐방해 보자.

지난 시간에 멈춰섰던 곳이 바로 국사당과 선바위였다. 국사당에서 내려갈 때 보이는 성벽은 대부분 새로 보수한 것이다. 골목을 따라 성곽을 내려가다 보면 '옥경이 슈퍼' 오른편으로 권율장군 집터와 ‘딜쿠샤’가 나온다.

딜큐샤(DILKUSHA)

딜큐샤(DILKUSHA).ⓒ 이윤재


딜큐샤(DILKUSHA)

딜큐샤(DILKUSHA).ⓒ 이윤재



딜쿠샤(DILKUSHA)는 이상향을 뜻하는 힌두어이다. 권율이 죽고 320년이 지난 후 권율장군 집터에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가 1923년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영감을 받아 저택을 지었다.

서울(경성)에서 수입품 판매상을 하던 알버트 테일러(1875~1848)는 3.1 만세운동 시작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 브루스 테일러를 낳게 된다. 당시 만삭이었던 아내가 입원해 있는 세브란스 병원에 일제경찰에 쫓기던 독립운동가들이 피신해 들어왔고, 독립선언문 종이 뭉치를 아내의 침상 밑으로 숨겼다. 일본경찰이 미국인 임산부의 침상을 수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과 3.1운동에 애정을 갖고있던 알버트는 그날 밤 이 독립선언서를 동생인 빌 알버트의 구두 뒤축에 숨기고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가게 했다. 선언서 발행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에 알버트가 쓴 기사와 함께 미국으로 전송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조선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깊었던 미국인 알버트는 태평양전쟁의 발발(1941)로 일제에 의해 추방이 되었고,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오게 된다. 3년 후, 알버트는 미국에서 죽지만(1948년)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으로 양화진의 아버지 옆에 묻혔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이 건물은 6살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던 알버트의 아들 부르스 테일러가 2006년 이 집을 찾으면서 그 역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주택으로 쓰이고 있다.

딜쿠샤에서 근대사를 살펴본 뒤 이어져 내려오는 길에는 주로 근현대사의 유적지들이 많이 있는데 홍난파 생가와 경교장 등이 그것이다.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 이윤재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 내부.ⓒ 이윤재



사진은 홍난파의 생가 모습이다. 현재는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홍난파의 집은 애초 1930년대 어느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집이다. 남대문시장이 있는 상동(尙洞)에 있던 독일영사관이 1906년 봄, 종로구 평동 26번지에 위치한 한성전기회사 사장 콜브란의 주택을 구입하여 옮겼다. 독일영사관이 위치하자 주변으로 독일인들이 많이 모여살게 됐다.

이 집 또한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집이었으나 홍난파가 1935년 후반(38세)에 이사 왔다. 그는 이 집에서 6년 동안 살다가 1941년 늑막염에 걸려 경성요양원에서 여름의 긴 무더위가 끝날 무렵인 9월 30일,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홍난파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작곡가로 초기 작품으로는 '울밑에선 봉선화야'로 시작해 우리 귀에 익은 가곡 '봉선화'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더불어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로 시작하는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작곡가였다.
그러나 이후 그는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여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한 친일 경력이 있다.

자. 이제 인왕산 성곽 코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성곽을 따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사직공원의 서쪽방향이다. 양의문교회와 상록수 어린이집 사이의 길이 옛 성곽의 자리로 지금은 도로의 축대로 쓰이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보자. 경희궁과 서울시 교육청의 서쪽을 따라 내려가면 강북삼성병원과 돈의문(서대문) 표지판이 나온다.

돈의문터

돈의문 터.ⓒ 이윤재



이곳에서 서대문의 위치를 먼저 살펴보자. 강북삼성병원의 왼쪽(서남쪽)이 서대문 사거리이고 동쪽은 새문안길이다. 서대문에서 새문안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광화문사거리를 지나 동대문까지 연결되는 종로이다.

경희궁 앞길이 새문안길, 신문로로 불리는 까닭은 돈의문이 여러 번 자리를 옮겨다니며 최종 이곳에 올 때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근처에 신문사가 많아서 신문로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면 삼성병원 안에 오래된 2층 건물이 보인다. 백범 김구 선생이 거처했던 경교장이다. 그리고 돈의문 표지석에서 서대문사거리 방향으로 보면 서울적십자병원이 있는데, 이곳은 경기감영(경기도청) 자리이다.

경교장

경교장.ⓒ 이윤재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상해에서 귀국한 후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할 때까지 3년 7개월간 거처했던 곳이다. 경교장은 파란 많은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 공관, 한국독립당 활동 등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19일 김구 선생이 반공학생들의 반대 시위 속에서도 남북 협상을 위해 길을 떠나면서 연설을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만약에 우리 동포들이 양 극단의 길로만 돌진한다면 앞으로 남북의 동포는 국제적 압력과 도발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동족상잔의 비참한 내전이 발생할 위험이 없지 않으며, 재무장한 일본군이 또 다시 바다를 건너서 세력을 펴게 될 지도 모른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948년 2월 10일 백범 김구 선생의 연설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의 일부다. 이 연설을 통해 김구 선생은 분단 정부 수립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어 평양으로 향해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김구 선생은 경교장 현관 위 발코니에서 군중을 향해 연설을 자주 했다. 그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둔 곳도 바로 경교장 2층 거실이었다.

이곳에선 김구 선생 서거 후 한국전쟁 때 미 특수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다 1967년 삼성 소유로 넘어간 뒤 병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김구 선생의 서재와 기념관이 있다.

이렇게 서울성곽 두번째 탐방 코스를 마쳤다. 다음 시간에는 세번째 탐방 코스인 서대문~정동~남대문의 정동 일대를 함께 걸어보자. 봄꽃이 만발하고 날씨도 많이 따뜻해졌으니, 다음 시간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서울성곽 탐방을 해도 좋을 듯하다.

*참고 문헌: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이현군 저), 답사여행의 길잡이_서울편(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이윤재 동대문나눔연대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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