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여행/서울

100425 선농대제 @ 선농단

by 블루청춘 2010. 4. 25.

조선은 농업이 경제활동의 중심인 농업사회로서, 이를 진흥시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농업과 곡식의 신, 양잠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농업과 곡식의 신을 모신 선농단(先農壇)과 누에의 신인 선잠단은 종묘, 사직 다음으로 중시되었다.

이곳에서 임금은 직접 늦봄에 농민들과 함께 직접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의식인 친경례를 행하였고, 늦여름과 가을에는 직접 낫을 들고 수확을 하는 친예례를 행하였다.

왕은 지금의 동대문 밖 10리, 전농동에 있는 동적전에서 친경례를 행하였는데 적전을 관리하던 관청이 전농시였으므로 전농동이 전해진다. 그리고 동적전에는 선농단을 만들어 농업의 신 선농(先農)과 곡식의 신 후직(后稷)을 모셨다.
여기에서 임금은 직접 양반관료 20여명, 한양농민40명, 경기농민 50여명과 함께 쟁기로 밭을 갈고 제사를 올렸다.

친경례를 행하는 날 왕은 동적전에 행차하여 선농단에 제사를 올렸고 이때에 여민락(세종때 작곡된 관현악곡으로 용비어천가의 일부 내용을 가사로 삼았다. 여민락은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으로, 종묘등에 왕이 행차할때 자주 연주되었다.)이 연주되었다.

백성들은일이 끝난 후 왕 앞에 모여 네 번의 절을 올렸다. 그러면 왕은 수고한 백성들에게 석잔의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다. 술은 막걸리, 음식은 고기를 뼈째 푹 삶은 선농탕, 이른바 설렁탕이었다.
조선은 소를 먹지 않았으므로 이때만큼은 백성들도 소고기를 맛볼수 있는 날이었는데, 한정된 양의 고기를 가장 많이 먹을수 있는 방법이 뼈째 삶아 먹는 것이었기에 탕으로 끓인 것이다. 그나마 높은 사람부터 살코기를 배급받아 평민들은 고깃국물이라도 얻어먹으면 다행하었다 한다.

-------------------------------------------------------------------
동대문구 제기동에는 선농단이 남아있는데, 순종(19010) 재위까지 행해지다 중단되었다. 이후 1979년부터 선농단친목회라는 분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올리다가 1992년부터  보존위원회와 동대문구가 제를 올리고 있다.
처음 참가해본 선농제에서는 책에서만 보아오던 임금의 행차와 제사, 그리고 궁중음악과 제례악까지 볼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제사지내기가 싫어 꾀병을 냈다는 영조의 일화처럼 과연 제례절차는 지루하고 복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