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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역사탐방

담양 소쇄원

by 블루청춘 2010. 8. 26.

1983년 7월 20일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5월 2일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전체 면적은 4,060㎡(지정구역), 118,866㎡(보호구역)이다. 이곳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을 지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정원이다.

제월당()과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고암정사() 등 1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고,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다. 또한 광풍각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남아 있다.

홍문관() 대사헌()으로 있던 소쇄 양산보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다.

소쇄원의 조성연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양산보가 낙향한 1519년 이후부터 조성되기 시작되었다. 소쇄원은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의 교류처 역할을 하였다. 송강 정철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양산보는 15세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 들어간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시기였다. 조광조가 이끄는 사림파는 중종반정 이후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와 정치혁신을 꾀하려다 기득권인 훈구파의 반발과 공격을 받아 입지가 약해지게 된다. 훈구파가 남양군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씨를 이용하여 '走肖爲王(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구절을 꿀로 써서 벌레로 하여금 파먹게 한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이고, 밤낮으로 그에 대한 모함을 하게 한 것이다. 이에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회의를 가졌던 중종이 훈구파 쪽으로 돌아서자, 훈구파는 반대 세력인 사림파의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다. 사림의 거두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양산보의 나이 17세 때,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휘말려 사사되자 그는 세상을 멀리하고 자연에 귀의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자 고향에 아담한 정원을 짓는다.

양산보는 이를 '시원하고 깨끗한 정원'이라는 의미의 소쇄원으로 이름짓고, 이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의 소쇄옹으로 자신의 호를 지어 부르게 한다. 담양벌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광주호를 끼고 구비구비 돌아 들면 남쪽 골짜기에 소쇄원이 있다. 이곳에서 양산보는 죽을 때까지 학문에 정진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먼저 소쇄원에 들어서면 정원의 입구이자 자연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인 애양단이 있다. 애양단은 송시열이 붙인 이름인데 김인후가 지은 시구절 중 "양단동오(陽檀冬五)" 라는 시제를 딴 것이다. 주변의 계류가 갈지 자 형상으로 5번 흘러내린다는 오곡문(五曲門) 주위에는 넓은 암반이 수없이 놓여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제월당이 양산보의 사적 공간이라면, 광풍각은 손님을 위한 일종의 사랑방과 같다. 제월당에서 독서하며 학문에 전념하다가, 먼 곳에서 반가운 벗이 찾아오면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광풍각인 것이다.

소쇄원에는 양산보의 이종사촌인 송순과 사돈인 김인후, 정철 등의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면서 교류를 다졌다. 제월당에는 김인후의 소쇄원 48 영시가 남아 있는데, 그 정취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제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