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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090510 낙산공원 서울성곽 답사

by 블루청춘 2009. 6. 20.
서울 성곽(-城郭)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이다.

 1395년(태조 4년)에 서울을 방위하기 위해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쌓았다.

 성곽을 천자문의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97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여덟 방위로 4대문(동 흥인지문, 서 돈의문, 남 숭례문, 북 숙정문)과 4소문(동북 홍화문, 동남 광희문, 서북 창의문, 서남

 

소덕문)을 지었다.

 

숙정문은 숨겨진 문으로 문루를 만들지 않았다.

 1422년(세종 4년)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성을 대대적으로 고쳤다.

 1451년(문종 1년)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수어졌다.

 1616년(광해군 8년), 1704년(숙종 30년), 1743년(영조 19년) 고쳐졌다.

 일제 시대 때 도시계획과 한국 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부수어졌다.

 지금은 삼청동·성북동·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있고, 흥인지문·숭례문·홍화문이 남아있다.

 

낙산

낙산은 서울 종로구와 동대문구 및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도성의 동쪽 산에 해당된다. 낙산은 산 모양이 낙타(camel)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낙산은 남산(南山)·인왕산(仁王山)·북악산(北岳山)과 함께 서울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에 대치되는 동쪽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된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할 당시 낙산을 좌청룡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산세가 길게 뻗치지 못한데다가 산 또한 인왕산에 비해 허(虛)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조선말기에 와서 낙산 끝자락에 있는 도성의 동문인 동대문, 즉 흥인문에 갈지(之)자를 하나 더 넣어 동대문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가한 일요일 아침에 회계정리를 하고, 점심에는 성북나눔연대에 들려 홈페이지 기획회의를 한뒤 부인을 만나러 대학로로 향하는 길에 혜화문이 보였다. 그러던중 한성대입구 삼선동에서 낙산을 넘어 대학로로 넘어가는 쪽에 서울성곽이 있다는 것이 기억나 답사를 해보기로 하였다.

 

삼선동의 산동네를 10분정도 올라가니 무허가건물을 철거하며 서울성곽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러다 성곽이 나타났는데, 이 성곽은 무려 500여년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복구한 흔적이 보였다. 

▶ 오른편의 돌과 왼편의 돌의 크기와 모양새가 다른것으로 볼때 축조 시기가 다른것 같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듯이 임진왜란과 수많은 전쟁을 겪어서인지 불에 그을린것처럼 돌이 검었다. 이렇게 중요한 문화유산이 이렇게 방치되는것이 참 안타깝다.

 

오른편은 삼선동쪽인데 산동네철거가 여기에도 진행중이었다. 한편으로는 문화재도 보존해야겠지만 산동네사람들은 또 어디론가 쫒겨간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기도 하다. 여기저기 성곽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삼선동 산동네

조선시기 축조한 아랫돌과 80년대 복원한 윗편의 돌이다. 어쩜 이렇게 서로 안어울리게 복원을 해놓았는지 안쓰럽다. 수많은 민중들이 정으로 깍고 날라쌓았을 진중한 세월의 흔적이 뭍어나는 아랫돌과 기계로 반듯하게 잘라 밧듯한 윗돌은 서로 너무 부조화스럽다.

 

 복원2

 복원3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옛 산동네의 흔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삼선동 골목길

 이쪽도 새로 공원을 조성중인것 같다.

 

삼선동쪽 끝자락에는 성북구에서 종로구로 넘어가는 작은 문이 있는데, 이문을 조선시대에는 비밀통로인

'암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문을 지나면 낙산공원쪽 혜화동이 나온다.

 

 

 낙산공원

 

 낙산공원에 있는 낙산전시관의 사진. 1960년대 청계천변 판자집이다.

 

낙산동쪽의 무허가 판자집들이다. 60년대 풍경.

 

 

낙산공원을 따라 내려오니 젊은이들이 가득한 마로니에 공원이 이어졌다.

아쉽지만 오늘의 유적지 답사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