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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서울

왕릉 따라 ‘조선왕조기행’ 떠나볼까

by 블루청춘 2009. 6. 20.
왕릉 따라 ‘조선왕조기행’ 떠나볼까
 
유네스코가 최근 조선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면서 왕릉을 다시 찾는 발길이 늘고 있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왕릉 나들이는 꿈도 꿀수 없는 일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 잠든 왕릉에 일반인들이 발을 들여놨다간 능지기(참봉)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쫓겨나는게 고작이었다.

왕릉 주변으로 조성된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등은 땔감이나 집짓기로 탐스러운 나무들이었지만 벌목은 커녕 낙엽 한 장 외부로 유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지켜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과 인간의 공간’ 왕릉이 한국에만 모두 42기에 달한다. 이들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 그리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을 제외한 39기가 서울에서 100리(약 40㎞)안에 남아있다.

자격루

▶ 사람은 죽으면 한 평? 왕릉은 13만평
= 죽으면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땅에 묻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들 얘기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들은 죽어서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난 아들, 경종이 잠든 의릉의 크기는 43만 4386㎡, 약 13만 1400평의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렇듯 전국에 있는 왕릉의 40군데의 면적만 합쳐도 총 1935만㎡(585만평)에 달한다. 일각에서는 안그래도 땅이 부족한 작은 나라에서 이런 호화무덤 때문에 땅부족현상만 심해졌다고도 하지만 이는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대의 왕릉은 조선왕조의 철학과 제례, 그리고 건축ㆍ토목양식을 총 망라한 문화재로 손색없다.

▶ 3단으로 구성된 조선왕릉 = 릉은 왕릉이 있는 능침공간과 석물들이 있는 2단, 3단부분, 그리고 주변에 부속건물과 숲, 잔디밭등이 있는 공간으로 나뉜다.
능침공간에는 양지바른 곳에 넓은 풀밭을 만들고 거대한 능을 만든다. 옆으로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 12면을 세운 뒤 13칸의 난간석을 두른다. 그 외에도 돌로 만든 양과 호랑이상 각 2쌍과 혼유석을 배치하고 양쪽에 망주석을 1쌍 세운다. 그 옆으로 다시 3면의 곡장을 설치하고 나서야 능침공간이 완성된다.

건원릉


한단 아래에는 문인석과 석마 1쌍, 그리고 혼령에게 길을 알려주는 장명등이 배치된다. 다시 그 한단 아래는 무인석과 석마 1쌍이 배치되는 등 2단, 3단 부분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수복방, 수라간, 어도(임금 행차길), 우물 등을 만들고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때죽나무, 오리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철쭉, 진달래등이 넓게 펼쳐 봄에는 꽃향기를, 여름에는 녹음을,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상록수의 푸르름을 각각 뽐낸다.

▶ 건원릉엔 왜 억새가?=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릉은 잔디 대신 억새로 떼를 입혔다. 태조가 계비 신덕왕후의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앙심을 품은 태종이일으킨 ‘왕자의 난’. 권좌에 오른 태종은 신덕왕후 옆에 묻히길 원했던 태조의 원을철저히 묵살했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파괴한 뒤 태조를 홀로 모신 쓸쓸한 무덤이 건원릉이다. 태종은 뒤늦게 뉘우치고 아버지 고향 함흥의 억새풀을 가져다 봉분에심고 깍듯이 예를 갖췄다고 한다. 이후 태조의 건원릉만은 잔디가 아닌 억새로 떼를입혀 갈색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의 반목이 부른 애처로운 광경이다.

태릉 능침

영릉정자각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은 세종대왕이 묻힌 곳이다. 조선 초기에 과학혁명을 일으킨왕 답게 영릉에는 세종대왕의 작품들이 볼거리다. 용 두마리가 실을 물고 날아로르는동상은 사실 ‘해시계’다. 용들이 물고 있는 실의 그림자가 돌아가면서 시간을 표시한다. 톱니바퀴가 없던 시절, 자연의 이치를 이용해 시간을 알 수 있었던 조상들의 지혜를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혼천의ㆍ자격루등 국사책에서 말로만 들었던 세종의 과학사랑이 영릉에 그대로 복원돼 있다. 각종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던 곳을 지나 훈인문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세종대왕릉이 보이는 넓은 정원이 나타난다. 원래 정원한 구석으로 가면 진달래가 화창한 진달래 길로 등산을 할 수 있는 코스가 있어 지난해까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올해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바로 이웃한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에 진달래가 피어 관광객들의 아쉬움을 달랜다.

영릉해시계


경기도 화성의 융릉, 즉 사도세자와 사도세자비 혜경궁홍씨 합장묘는 부자간 정이 담긴 효심의 결정이다. 정조가 뒤주 속에서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을 풀어주고 복권의 상징으로 세운 게 융릉이다. 정조는 지금 서울시립대 터의 사도세자 릉을 화성으로 옮겨 세운 융릉을 틈틈이 참배했다. 상경길, 서울로 향하는 1번국도변 지지대고개에서 눈물짓곤 했다는 효심이 읽힌다.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인 사도세자의융릉 근처에 건릉을 만들어 곁을 지켰다.

융릉에는 1790년 풍수적 원리에 의해 지어졌다는 연못 ‘곤신지’가 있다. 곤신방(주역에서 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으로 풍수적으로 이곳에 물이 있으면 좋다 하여 연못을판 것이다. 연못 근처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히기 제격이다. 융릉과 건릉 사이의 산책로는 보통 화재예방을 위해 통제하지만 5월 15일을 기준으로 개방하고 있다. 떡갈나무와 때죽나무등이 심어져 있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정조의 효심을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
김재현 기자(madpen@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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