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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290

419 민주묘지 대학시절 4월 19일 즈음에는 항상 데모를 했던것 같다. 대학에 들어갔던 97년 2번째 집회가 종묘에서 있었던 '419혁명정신계승 서총련 결의대회'였던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날 하마터면 경찰들에게 잡혀갈뻔했다. 집회가 뭐가먼지도 모르고 도로로 진출을 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백골단 아자씨들이 학생들을 잡아갔던 것으로 기억.. 암튼 그날 최루탄이 난무하고 지하철역을 두더지처럼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던 기억.. 한편 학교에서는 419를 기념해 마라톤대회와 자전거대회가 열렸다. 1000여명이 넘게 갔었던것 같은데 봄볕 화창한날 예쁜 여학생들과 커플자전거를 타고 하이킹가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10년정도만에 처음 419 묘역을 답사하였다. 당시에는 항상 뛰어서 왔기에 제대로 못봤었는데, 오늘은 비가내린다. ▲입구... 2010. 2. 9.
비오는날 쓸쓸한 '연산군묘' 조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과 부인 거창 신씨의 무덤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성종 7년(1476)에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두번씩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등 성품의 광폭함이 드러나자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1506년 왕직을 박탈당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 1506년에 죽었다. 부인 신씨가 연산군 무덤을 강화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달라 청하여 옮기게 되었다. 무덤 주변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도 있으며, 혼유석·장명등·향로석 등 석물이 서 있다. 묘비석 앞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 있고, 뒷면에는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이라 새겨 있다. 1) 우선, 묘역이나 구성 석물들이 오랜 기간동안 방치되고 제대.. 2010. 2. 9.
청계천의 철새와 생태 청계천은 단기간의 졸속공사로 인하여 콘크리트위에 흙을 덮어 만들어진 인공하천이다. 청계천의 물은 한강물 10만t+ 인근 지하철역에서 발생하는 용수 2만t 정도를 끌어와 청계광장, 동대문, 성북천등에서 흘려보내진다. 그러나 청계천은 정기적으로 녹조현상이 나타난다. 한강물에 포함되어 있는 다량의 플랑크톤등이 침식되면서 생기고 녹조뒤에 포자라는 미생물이 발생한다. 또한 콘크리트로 덮어 지표면과 숨을 쉬지 못하는 아래의 토양때문에 자연정화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녹조와 이끼가 미관상 좋지 않아 정기적으로 수많은 인력이 바닥과 돌의 이끼를 청소하고는 있지만 역부족인듯 하다. 따라서 환경운동하는 사람들은 청계천을 가리켜 콘크리트 어항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어쨋든 도심에 숨통을 틔우는 하천이 생긴것은 반가운 일이.. 2010. 2. 2.
청계천의 역사와 현재 청계천은 지금의 한강처럼 조선시대 서울의 도심부를 관통하는 중요한 도시하천이었다.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이전부터 흐르고 있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 상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 2010. 2. 1.